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문단 편집) === 전범재판 === [[파일:external/4.bp.blogspot.com/manstein.jpg|width=400]] ▲ 전범 재판에 출두한 만슈타인. [youtube(VbB0kaukvlk, width=480, height=360)]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의 만슈타인. 무성 영상이며 약 45초부터 등장한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만슈타인의 인종 범죄에 대한 증언과 증거가 속속 제출되었다. 여기엔 소련 측 검사뿐만이 아니라 과거 만슈타인 부하들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다음은 그의 전쟁범죄 동조에 관한 일화. 만슈타인의 사령부로 가던 한 [[대위]]는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의 만행을 목격했다. 이는 범죄 행위였다. >이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태였어요. 포로들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해서 그들을 뒤로 넘어뜨렸고,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머리에 권총을 쏴서 죽이는 걸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건 집단 [[학살]]이었어요. >-울리히 군체르트(Ulrich Gunzert) 대위[* 포로 학살은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므로 당연히 국제법 위반이다. [[확인사살]]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음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만슈타인이 변호사에게 답하는 장면이다. >[[변호사]]: 유대인 총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만슈타인: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직접 그에게 유대인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를 올리고, 그걸 막을 방법에 관해 물었다면 더 빨리 깨달았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만슈타인이 보고받는 일을 교묘히 피했기 때문이죠. 자신의 군대 내에서 부하들이 유대인을 총살해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후방의 점령 지역에서 유대인을 총살하고 있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자신의 군대가 점령한 지역이 아니라고 잡아뗐어요. 그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가 있었거든요. >- 울리히 군체르트 대위 더욱이 실제 만슈타인은 1941년 11월 20일, 남부집단군 예하 11군의 지휘권을 인계받으면서 '''"유대인-볼셰비키 체제는 완전히 근절되어야 한다."며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는 총통 명령에 근거하여 전 독일군에 공통적으로 내려진 지시였지만, 당시 개념 있는 군단장급 지휘관들은 상당수가 이 지시를 하급 부대에 전파하기를 거부하거나 참모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한 발 물러서곤 했다. 만슈타인은 이런 소극적 반대자의 범주에 들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발터 폰 라이헤나우]] 주도 하의 남부집단군에서 유난히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하게 된다.] '''만슈타인이 인종 학살 범죄의 동조자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나치는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총애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 기회주의자였음은 분명하다.[* 프로이센 장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오는 특징이다. 프로이센 군인, 특히 융커들은 기본적으로 [[군국주의]] 사상을 신봉했으니 히틀러가 맘에 들진 않지만 군비증강책을 맘에 들어해 따른 장교들이 많았다. 다만 만슈타인은 유독 이런 행보가 심했다.] 한직으로 좌천된 직후 지인을 통해 히틀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프랑스 침공]]의 기본 계획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라스텐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클람로트 중령과 슈티프 장군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명령을 받고 포위망을 탈출한 빈리히 베어 대위에게 히틀러를 축출하려는 세력에 가담할지 권유했을 때, 히틀러의 리더십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그 실상을 막 깨달은 베어는 아직까지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하자 클람로트는 이해하면서도 '''만슈타인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는 테이블에서 히틀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그건 그냥 지껄여 대는 것뿐일세. [[예스맨|히틀러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거나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는 정확히 시키는 대로 한다네. 그는 그런 사람이야.]]”''' 이러한 만슈타인의 면모가 국방군 사이에 상당히 널리 유명했던 듯, 전우이자 친구인 또 한 명의 천재 [[하인츠 구데리안]]도 만슈타인은 히틀러 앞에서는 최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며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쉬움을 표현한 바 있다. 유의해야 할 점은, '''인종 범죄에 적극 동조했으나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는 것.''' 히틀러는 애시당초 군부의 주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귀족 출신의 장성들을 대단히 싫어했고, 낫질 작전이 입안되었을 때 히틀러의 반응은 '''저 녀석은 마음에 안 들지만 작전 하나는 탁월하다니까'''였다. 만슈타인 본인도 히틀러를 천박하다고 많이 싫어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1944년의 후퇴를 빌미로 삼아 만슈타인을 해임할 때 "그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나치가 아니므로 해임되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즉, 그가 보인 기회주의자적 행동은 어디까지나 그의 야망 - 그가 히틀러를 싫어함에도 전쟁을 지지한 것은 그의 내면에 깊이 숨어 있던 거대한 야망 때문이었다 - 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사적으로는 히틀러를 싫어했다고 하지만, 1939년 4월 20일 히틀러의 50번째 생일 기념 연설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는 신이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보낸 지도자'라고 칭송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이 연설에서 '독일 민족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막는 적대적인 세계를 경계하면서 또 한 번의 세계 대전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하였다.[* The Myth of the Eastern Front: The Nazi-Soviet War in American] [[이스라엘]] 역사가 오메르 바르토브(Omer Bartov)는 만슈타인 같은 장교들의 발흥은 대개 열렬한 국가사회주의자인 기술관료적 장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경향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가 정말 히틀러를 싫어했고 히틀러가 그를 싫어했다고 하더라도, 만슈타인의 인종 범죄 혐의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유대인]]의 군 퇴출에 대해서 소극적으로라도 반발한 얼마 안 되는 고급 장교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만슈타인처럼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직접 명령한 고급 장교는 더욱 극소수이다. 전후 논란이 된 [[카를 되니츠]]의 해군 대제독 연설도 유대인에 대한 혐오주의를 조장하는 정도였다면 만슈타인은 자신의 명령서에서 'the soldier should understand __the necessity of punishment of Jewry__'라고 직접적으로 명시했다. 국내에서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라이헤나우]]의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강조 명령]]에 대한 비난만이 유달리 강했지만, 전사학자들은 1941년 10월 10일의 라이헤나우 명령서와 1941년 11월 20일의 만슈타인 명령서를 같은 선상에 놓는다. 특히 만슈타인은 악명 높은 '''SS-아인자츠그루펜 D 지휘관 [[오토 올렌도르프]](9만 명의 학살[* 이것도 적게 잡은게 D부대 손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만 68만 명이 넘는다. 다만 여기서 혐의는 자신이 직접 명령한 학살에 한해서이다.]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된 장본인)'''에게 자신과 11군 참모장 오토 뵐러가 직접 서명을 한 [[1942년]] [[2월 2일]]자 편지를 두 통 주고 받았는데 여기엔 '유대인에 대한 조치 이후 그들에게 징발한 손목 시계를 배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슈타인은 금장, 은장 시계들이 전부 [[베를린]]으로 전해지는 것에 불만을 가졌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손목 시계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후 올렌도르프는 11군에게 손목 시계와 동절기 옷을 보냈다. 이는 모두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소지품'''이었다. 올렌도르프는 만슈타인에게 특별 행위(special action)에 사용할 트럭과 탄약을 요청했고, 실제로 만슈타인과 참모장 오토 뵐러는 여가 시간에 올렌도르프와 함께 [[콘트랙트 브리지]] 게임을 즐겨할 정도로 친밀했다.[* Where the Iron Crosses Grow: The Crimea 1941–44] 이에 대해 만슈타인은 재판정에서 '편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죽인 게 아니라 그저 시계를 강제로 빼앗은 걸로만 알았다' 등등으로 변명했다. 여담이지만 기타 명령서에 관해서도 눈이 안 좋아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올렌도르프와 편지로 전화로 수없이 연락을 주고받은 오토 뵐러조차 히틀러에게 '국가사회주의자로서 부족하다'며 상급대장 승진에 실패했다. 즉, '''히틀러 기준에 나치가 아니더라도 이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은 지극히 별개의 기준'''이었다는 것. 만슈타인은 끝까지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부하들은 유대인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올렌도르프는 만슈타인이 이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11군이 직접 개입했다고 자백했고 혐의를 인정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위에 서술된 명령서는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이미 발견되었지만, 그 외에도 [[파르티잔]]에 대한 처형, [[청야전술]]로 인한 민간인 피해에 대한 책임 등의 혐의가 더해져 결국 [[1949년]], 만슈타인은 17가지 전쟁 범죄 혐의로 함부르크 군사법정에 기소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